디아블로3 초반 소감




디아블로는 원래가 ‘파밍하는 재미’에 초점을 맞춘 게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스토리니 그래픽이니 필요없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고, 가장 핵심이 되는 재미가 파밍하는 재미라는거죠. 그리고 이런 구조의 게임들은 물론 반복 플레이가 기본이 됩니다. 그렇다고 정말 판에 박힌 반복 플레이가 나오면 위험하기 때문에 여기에 적당한 수준의 랜덤함이 들어가 주는거죠. 맵과 아이템의 강한 랜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디아블로1이 넷핵에 액션을 넣었다는걸 생각하면 필연적입니다. 

한편 파밍하는 재미라는건 원래 자기 캐릭터의 스킬트리와 그에 맞는 아이템을 구상하고, 이렇게 구상한 아이템을 얻어가는 과정입니다. 어떤 상황도 돌파 가능한 만능의 세팅이라는게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이를 적용하는거죠. 여기까진 거의 게임의 보편론입니다만, 디아블로는 특히나 ‘숫자’ 적인 최적화에 좀더 주안점을 둔 게임으로 보고 있습니다. 디아블로의 보통 난이도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숫자들, 즉 데미지 텍스트나 HP 등등이 커봐야 서너자리, 어지간하면 두어자리인데 비해서 불지옥에서 보는 숫자들은 만단위 넘어가는게 보통인 수준인건 그때문입니다. 컨빨로는 물리적으로 극복 불가능한 한계가 주어지는거죠.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자기 캐릭터의 스킬이나 스탯이라는 ‘숫자’에서 전략을 갖춰 도전해야 합니다. 불속성 몬스터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면 이를 상대하기 위해서 불저항을 맞춰야 합니다. 적중시 피흡에 촛점을 맞춘 회복 전략을 가지고 있다면 공속이 빠른 무기를 파밍해야하죠. 데미지를 체력으로 받아넘긴다면 활력에 초점을 맞춰서 아이템을 고민해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디아블로2는 일종의 디자인 의도대로 플레이되지 않았던 게임으로 봅니다. 특정한 아이템이나 스킬트리가 국민트리 또는 국민템이 된다면, 이미 상황에 따라 다른 전략으로 접근&대처한다는 개념이 아닌거고, 휠바바나 트랩씬 등의 국민트리와 할배검, 윈드포스 등 국민템의 존재는 이런 개념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상징하죠. 어쨌든 히트는 했지만요. 사실 이것도 좀 의심스럽긴 해요. 캐릭터 스탯을 한 번 찍으면 돌이킬 방법이 전혀 없었거든요. 이건 캐릭터 육성의 다양함을 시험하기엔 너무 가혹한 장치죠. 이 부분을 커버하기 위해 새 캐릭터를 일정 수준까지 육성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인 카우방을 방치했다고 보고 있구요. 

아무튼 그래서 전 디아블로3가, 디아2에서 실패했던 ‘상황에 따른 수치적 전략’ 이라는 개념을 좀더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봅니다. 이를 위해 스킬 트리는 캐릭 다시 키우기는 커녕 마을로 돌아가거나 비용을 소모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간단히 변경 가능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볼 수 있도록 아이템에 귀속이라는 개념도 없구요. 이런 기반 하에서 평균적인 플레이어는 지옥 난이도를, 지옥 난이도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스킬 운용에 대해 깨닫고 여러 다른 종류의 아이템들을 파밍한 고급 플레이어들은 불지옥 난이도를 플레이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 상황에서 저는 디아블로3의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우선은 다들 지목하는 초반 악사나 법사의 특정 스킬 문제죠. 이 스킬들이 의도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했기에, 불지옥 파밍이 너무 쉽게 뚫려버린 감이 있습니다. 전 이걸 일종의 버그라고 봐요. 여기서 ‘일종의’ 라는 단서를 붙인건 이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기술적인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죠. 수도승의 무한공력 같은거야 기술적인 문제로 볼 수 있지만 법사와 악사의 연막, 힘갑은 글쎄요. 아무튼 얘들은 명백하게 오류성이고, 그렇기에 오히려 크게 문제삼을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패치되었기도 하구요. 

두번째가 핵심인데, 이건 디아블로 디자인팀의 잘못된 판단이라고 봅니다. 제 생각에 불지옥 난이도는 ‘파밍의 대상’이 아닙니다. ‘트라이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와우의 최상위 레이드 하드모드는 해당 버전 막바지까지 ‘트라이의 대상’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습니다. 서버내 최상급 공대들이나 ‘도전’ 정도 해볼 수 있는거고, 그 이하로는 진입 자체가 목표가 되는 수준이죠. 디아3의 불지옥도 그 비슷한 거라고 보는거에요. 문제는 플레이어들에게 전혀 그런 인식을 심어주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디아2의 최고난이도는 파밍의 대상이었고, 게다가 불지옥은 게임을 진행해나가면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언락됩니다. 누가봐도 파밍의 영역으로 보이죠. 실제 디자인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음에도요. 

만약 지옥 난이도의 디아블로가 정말 지옥처럼 어렵고, 불지옥에 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을 갖췄을 때만 가까스로 클리어 가능한 존재라면, 그리고 불지옥은 어지간한 캐릭터로는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지옥 난이도의 디아블로를 클리어할 수 있어야만 플레이가 가능한 장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지옥 난이도의 디아블로는 불지옥 진입을 위한 ‘관문’ 역할을 해줄 겁니다. 지옥 디아블로 클리어를 위해 무수히 트라이를 하면서 플레이어들은 불지옥의 위엄을 자연스레 체감할테고, 불지옥이 ‘아무나 못 가는’ 곳임을 너무나도 당연시하게 됐겠죠. 아무나 못가는 불지옥 대신, 누구나 갈 수 있는 지옥 난이도에서의 파밍은 평화롭고, 별다른 불만이 있기보다는 디아블로 돌파를 위한 연구의 장이 되었을테구요. 다시말해 불지옥이 파밍의 대상이 아닌, 트라이의 대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 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이미 늦었어요. 플레이어들은 당연하게도 파밍 대상이 되어야 할 불지옥에서 파밍이 쉽게 안된다는 점에 분노하고 있거든요.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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